
헌법재판소는 지금 최대의 위기 상태에 놓였다. 신뢰의 위기다. 지난 2월부터 최근까지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나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의 전국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탄핵 심판을 진행하는 헌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0%를 넘나든다. ‘신뢰한다’는 응답은 52% 전후이다. 헌재가 정치권으로부터 자기들의 이해득실에 따른 반발과 비난을 산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국민 다수에게 불신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아무리 정치적 양극화가 심하다고 하더라도 국민 40%가 불신한다는 사실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다수 국민이 헌법재판소를 불신하는 이유는 헌재가 중립적이거나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심판 절차와 내용 모두에서 그렇다. 우선 내용을 보자. 대표적인 사례가 감사원 감사 대상 기관에 대한 결정이다. 헌재는 감사원이 선거관리위원회 공무원의 직무를 감찰할 권한이 없다고 결정했다. 선관위가 헌법상 행정부 산하 기관이 아니라 독립기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관위를 감사 대상에 넣으면 선관위 업무인 선거 관리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감사원법 규정과 어긋난다. 감사원법 제24조 ③항은 감사 대상 예외 기관으로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3개만을 규정했다. 선관위는 없다. 그러나 헌재는 이 규정은 열거 규정이 아니라 예시 규정이라고 해석했다. 감사 대상 예외 기관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놓은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규정에 선관위가 포함돼 있지 않다고 해서 선관위가 감사 대상 기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아가 선관위를 감사 대상 기관으로 넣는 쪽으로 감사원법을 개정하는 것도 위헌이라서 안 된다고 했다. 헌재 결정은 숱한 법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헌재 결정에 법적 논란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헌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공정성·중립성 논란 자초
헌재 결정은 법적 논란을 떠나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에 문제가 된 감사 내용은 선관위의 채용 비리이다. 선관위 고유 업무인 선거 관리에 관한 게 아니다. 감사원 감사 결과 선관위 간부 자녀와 친·인척 특혜 채용이 잇따라 벌어진 사실이 드러났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전국 17개 시도 선거관리위원회가 최근 10년간 291차례 경력직 채용에서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878건에 달했다. 시도 선관위를 감독해야 할 중앙선관위는 감독하기는커녕 ‘우리는 헌법기관이니 법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불법·편법 채용을 부추겼다. 선관위 내에서는 중앙·지역 선관위 인사 담당자들이 “선관위는 가족회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헌재는 감사원이 선관위를 감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헌재 결정이 설사 법 형식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결정을 누가 옳다고 여기겠는가? 어떻게 헌재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선관위 공무원의 채용 비리를 감사한다고 해서 어떻게 선거 관리의 공정성이 침해될 수 있는가? 선관위 고유 업무인 선거 관리는 감사 대상에서 제외하더라도 일반 행정 업무는 포함시켜야 한다는 게 많은 국민들의 생각일 것이다. 헌재는 국민의 상식을 벗어난 결정을 했다.
헌재는 절차 측면에서도 신뢰를 잃는 일을 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 대행이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를 임명하지 않아 국회 권한을 침해했다고 우원식 국회의장이 제소한 사건에서다. 헌재는 당초 이 사건을 지난 2월 3일 선고하려 했다. 그런데 선고 예정 2시간을 앞두고 돌연 선고 일정을 연기한다고 밝혔다. 예정된 선고를 불과 2시간 전에 연기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이 자체가 헌재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선고 연기 이유였다. 지난 1월 22일 열린 재판에서 최 권한대행 측이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회 의결 없이 단독으로 (국회 권한을 침해했다고) 심판 청구한 것은 부적법해 각하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국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지는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이었다. 그러나 헌재는 최 대행 측 요구를 각하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선고를 하려 했다. 그러다 ‘졸속 재판’ ‘절차적 흠결’ 같은 논란이 불거지자 선고를 연기하고 지난 2월 10일 다시 변론을 열었다.
이날 변론에서 또 석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국회 측이 “이번 심판의 흠결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보완하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국회 측은 “국회에서 (사후) 의결할 준비”라고 답했고, 문 권한대행은 “본회의 의결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느냐”고 되물었다. 이후 나흘 뒤인 지난 2월 14일 국민의힘 불참 속에 민주당 주도로 국회에서 ‘마은혁 임명 촉구 결의안’이 가결됐다. 결국 헌재는 지난 2월 27일 마은혁 재판관 임명 보류는 잘못이라고 국회 측 손을 들어줬다.
민주당과 '짜고' 한다는 의심까지
헌재는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 사유에서 ‘내란죄’를 빼는 과정에서도 중립성과 공정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회 측 변호인은 ‘내란죄 삭제하겠다. 그게 재판부께서 저희에게 권유하신 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인은 논란이 되자 ‘권유’라는 표현은 잘못이라고 취소했다. 그러나 ‘재판부께서 저희에게 권유하신 바’라고 한 말이 실수로 나왔는지, 변호인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인식해서 나왔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후자라면 적어도 국회 측이 듣기에 헌재가 민주당 측에 내란죄를 빼는 게 좋겠다고 힌트를 준 게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 제3자 지위에 있는 심판관인 헌재가 어느 한쪽에 유리한 듯 여겨지게 한 모습 자체가 헌재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이 밖에도 헌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리 과정에서 신속한 결정을 앞세워 절차를 너무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증인 한 명당 질문·답변 시간을 일률적으로 90분으로 제한했다. 윤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했다는 지시가 사실인지는 국헌 문란 목적 여부를 가리는 핵심 쟁점이다. 그런데도 헌재는 이에 대해 충분한 심리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헌법재판소법은 탄핵 심판에 형사소송법을 준용하도록 정하고 있다. 유무죄를 다투는 형사 재판처럼 증거를 엄격히 살피고 당사자의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 헌재는 과연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나?
헌재 심리 과정에 공정성이나 중립성에 실질적인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심리 절차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지면 공정성과 중립성을 의심받기 쉽다. 재판은 실제로도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그 겉모습도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은 사법 윤리의 기본이다.
탄핵 찬반 흥분과 열기, 더 폭발할 수도
헌재를 비롯한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불린다. ‘선출된’ 권력인 입법부나 행정부와 다른 점이다. 선출된 권력은 국민에 의해 선출됐다는 사실 그 자체로 정당성을 확보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는 국민이나 다른 국가기관이 사법부의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고자 할 때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사법부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려면 무엇보다 사법부 결정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헌재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헌재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게 되기가 어렵다. 종국에는 ‘이런 헌재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이 생겨날 수 있다. 헌재의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신뢰를 잃은 헌재는 헌법과 법률에 따른 갈등 해소라는 본연의 역할도 할 수 없다. 이미 우리 사회는 탄핵 찬성과 반대로 쫙 갈라져 있다. 친구나 직장 동료 사이는 물론 가족 간에도 탄핵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찬반 양쪽 모두 흥분과 열기에 가득 차 있다. 이 흥분과 열기를 가라앉히려면 헌재가 갈등 해소라는 제 기능을 다해야 하고 그러자면 무엇보다 국민 신뢰를 받아야 한다. 헌재에 대한 높은 불신을 지켜보면서 탄핵 심판 결정이 흥분과 열기를 식히는 게 아니라 더 뜨겁게 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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