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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구 칼럼] 정화암의 아나키즘과 민주사회주의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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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구 언론인
입력 2025-03-1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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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구 언론인
[이춘구 언론인]


 
92년 전 중국 상해 공동조계에서 육삼정(六三亭)의거가 일어났다. 육삼정의거는 백정기·이강훈·원심창 의사 등이 1933년 3월 17일 중국요리점인 ‘육삼정’에서 중국 정부 요인을 매수할 목적으로 연회를 개최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처단하려 한 사건이었다. 의거 직전 비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세분의 의사가 일제에 붙잡혔다. 백정기 의사는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순국했으며, 이강훈·원심창 의사는 광복 후 석방됐다. 전북 김제역사연구회는 육삼정의거 92주년과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21일 오후 김제시 교월동에서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 주제는 ‘아나키스트 정화암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다. 정화암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육삼정의거를 주도했다.
정화암(鄭華岩, 1896~1981)의 생애는 격동의 시대를 극복하며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다. 1920년대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정화암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의 방편으로서 아나키즘 철학을 수용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공화국의 철학으로서 민주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정화암은 1896년 전북 김제 월촌면 장화리에서 태어났다. 김제는 정읍과 더불어 1984년 동학혁명의 중심지였다. 유년기에 정화암은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동학혁명의 이념을 온몸으로 체득했다고 본다.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은 동학혁명의 척양척왜 반봉건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독립운동 지도자인 이회영이 먼저 아나키즘을 수용하자 류자명·정화암·이을규·이정규·백정기도 따라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독립운동가들이 무정부주의, 무강권주의를 채택한 것은 순전히 독립운동의 방편이다. 여기서 무정부를 주창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타도하자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침략주의의 원흉으로서 식민지 조선 국민을 약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 이 같은 비인도적 정부는 당연히 없어야 하며, 없어져야 할 폭력집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화암은 테러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려 했다. 테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격이었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 국제연대를 강화하며 중국 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정화암은 1924년 4월부터 최초의 재중 한인아나키즘 단체인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창립 맹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1930년대 중국에서의 항일 의열투쟁을 주도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다. 신민부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민족주의-아나키즘 합작 조직인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한족총연합회는 배일·반공·상호부조 사상을 내세우며 교민의 단결을 다지려고 했다.
정화암은 1931년 9월부터 남화연맹에 합류했다. 남화연맹은 정치운동·사유재산제도·僞道德的宗敎·가족제도 일체의 부정·파괴와 새롭게 세울 무정부공산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했다. 남화연맹은 의열투쟁을 기본노선으로 하고 일제 원흉들을 처단하는 데 집중했다. 의열투쟁의 연장선 상에서 육삼정의거가 기획됐던 것이다. 1937년 7월 일본의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정화암은 이때 한인항일별동유격대의 대일항전을 독려하는 선언문을 발포하는 등 대일항전에 전력투구했다. 1939년 가을 정화암은 중국군의 협조를 받아 한중합동유격대를 발족시켰다.
정화암은 조국의 해방과 함께 귀국한 뒤에는 독립운동의 연장선 상에서 독재규탄 등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활동했다. 1954년 11월 이승만의 3선 개헌이 四捨五入으로 가결되자 정화암은 先이념 後창당을 주장하고, 민주사회주의를 혁신정당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민주사회주의 이념은 1951년 6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프랑크푸르트 선언-민주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를 기초로 한다. 민주사회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생산수단의 사회공유, 계획경제 수행과 더불어 개인의 정치적 자유평등의 인권확립을 수반할 것을 전제로 했다. 민주주의에 자본주의적 경제이념 대신 사회주의적 경제이념을 환치시키고자 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인 자유평등을 정치·사회적 생활에서 경제적 생활로까지 확대하는 형태이다. 국제관계에서는 반제국주의·평화유지·세계공동체를 지향했다.
민주사회주의는 정치적 자유평등을 배제하고 독재를 펼친 공산주의와 이를 수정해서 등장한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른 사상이었다. 민주사회주의는 인도주의적 이상주의에 따른 민주적 복지국가론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의 완전 고용, 생산의 공적 관리, 소득과 재산의 공평한 분배, 생활수준 향상, 사기업의 공공화, 협동조합의 창설, 복지정책 실행, 차별철폐 등을 주장했다. 정화암은 이를 ‘빈궁과 무지를 몰아내고 백색이든 적색이든 일체의 독재를 배격하며 만인평등의 순리에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자며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사상’이라고 표현했다.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1980년대 이후 퇴조의 길로 들어섰다. 일부 국가는 자신들의 나라가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강변하며 자본주의 국가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민주사회주의는 독일기본법에서 보는 것처럼 여전히 위력을 지니고 있다. 독일연방공화국기본법은 제20조 제1항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연방국가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화암은 일제 강점을 종식시키는 데 앞장선 용감한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이다. 정화암은 오늘날 국가 비상 상황을 아나키즘 관점에서 비판하고 민주사회주의의 이념을 변증법적으로 살피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 같다. 정화암은 지금 우리에게 “민주사회주의에 담대하게 도전하라! 그리고 대동사회를 성취하라!”고 외치고 있다. 정화암의 일생과 독립운동, 사상적 배경 등을 구분해서 정화암 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화암이 꿈 꾸던 대동사회를 건설하는데 힘을 모아야겠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춘구 필자 주요 약력

△전 KBS 보도본부 기자△국민연금공단 감사△전 한국감사협회 부회장△전 한러대화(KRD) 언론사회분과위원회 위원△전 전라북도국제교류센터 전문 자문위원△전 한국공공기관감사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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