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유 한 방울은 아버지의 땀, 난민의 눈물, 탐욕의 불꽃이었다. 탄화수소와 불순물이 섞인 이 검은물질은 산업화의 바퀴를 굴렸고,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누군가에게는 고되지만 가족을 위한 희망의 씨앗이었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통을 짓누르는 절망의 덩어리였다.
김아영의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Al-Mather Plot 1991)’은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알 마터 주택단지’를 배경으로, 석유를 매개로 개인과 경제성장, 난민과 전쟁, 망각과 현재를 이야기하는 영상 작품이다.
석유 한 방울의 '롤러코스터'
시각예술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김아영은 지난 20일 서울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Plot, Blop, Plop. 구획, 방울, 퐁당)’ 기자간담회에서 ‘알 마터 플롯 1991’에는 “개인사가 담겼다”고 말했다.“(부모님이 이 작품을) 전시 기간에 보게 될 텐데, 걱정이에요. 가족 간에 감정적 소통을 늘 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것들(개인사)을 끄집어내는 과정이 저로서도 쉽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10년 넘게 해외에 나갔던 시절에 대한 여러 기억이 있어요. (가족이) 너무 뭉클해지는 시간이 될까 봐 걱정이네요.”
지정학적 긴장에 출렁이는 유가는 삶의 파고로 이어졌다. 김아영의 아버지 ‘김’은 작가가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쿠웨이트로 떠났다. 그때가 1979년. 유가는 2차 ‘오일쇼크’로 폭등했다. ‘김’은 쿠웨이트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에서 밤낮없이 땀을 흘렸다. 이는 ‘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한국 건설사들은 ‘오일머니’를 벌기 위해 공격적으로 중동으로 향했고, ‘김’을 포함한 수많은 한국의 가장은 중동에 파견돼 여러 도시의 건설현장에 참여했다.

‘김’은 전운이 고조되는 1989년에 완전히 귀국했다. 그리고 롤러코스터가 시작된다. 그 이듬해 이라크는 ‘과잉생산으로 유가를 급락시킨’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석윳값은 급등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이라크에 맞선 끝에야 유가는 급락했다. 그의 아버지가 다녔던 건설사의 중동 사업 역시 적자로 손실 마감했다.
김아영은 그의 아버지가 몸담았던 회사가 만든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그곳에 머물렀거나 현재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한양아파트’로 불렸던 그 단지가 지어지는 동안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모래바람 속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아이들과 1년에 두어 차례뿐인 남편의 휴가를 기다렸다.
이후 그 단지는 이라크의 침공을 피해 온 쿠웨이트 난민들의 임시 거주지가 돼 ‘쿠웨이트인 아파트(Kuwaiti Compound)’로 불린다. 전쟁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회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때때로 깜빡거리는 전시장의 조명은 마치 전시장이 폭격에 노출된 듯한 긴장감을 준다. 아파트 단지 내에 고양이들이 많다며 웃는 주민의 인터뷰와 전쟁 당시 관련 인터뷰가 교차하며 과거를 망각한, 평화로운 듯한 현재를 조망한다.

한 방울의 파장은 '지금도'
그러나 관람객은 망각보다는 기시감을 느낄 듯싶다. 석유 한 방울이 일으키는 파장의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1975년 포항 일대에서 석유가 발견됐다는 해프닝이 2024년 ‘대왕고래’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고, 무차별 폭격으로 잿빛 도시가 된 중동 어딘가에서는 피 흘리는 아이를 안은 부모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절규하고 있다. 폐허가 된 이 땅의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켜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세계 최고 권력자의 리얼리티 쇼를 연상시키는 발언은 ‘게임화된 전쟁’ 걸프전과 닮았다.김아영은 성인이 된 후 이 '두꺼운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2014~2015년에 걸쳐 3부 연작으로 제작했던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Zepheth, Whale Oil from the Hanging Gardens to You, Shell)’에서 20세기의 역사를 석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바 있다. 그는 이번엔 당시 리서치한 문서, 책, 지도, 신문기사 등 풍부한 이야기들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했다.

김아영을 둘러싼 환경은 10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10년 전에는 불가능했던 이미지 제작이 가능해졌어요. 어린 시절 중동을 바라봤던, 판타지와 액션이 섞인 상상 속 중동이 존재해요.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아서 이를 중간중간 삽입할 수 있었어요. 알 마터 아파트를 CG로 구현도 했죠. 물론 현지 아파트를 찾아가서 주민들을 인터뷰 했고요.”
여러 국가를 떠돌았던 김아영은 현재 낙원상가에 사무실 겸 거주지를 꾸미고, 머무르는 중. “제 작업실에서는 종묘, 청와대, 경복궁, 북촌이 다 보여요. 북한산과 북악산도요. 명상하기 좋은 공간이죠. 그런데 사실 장소가 좋아서 갔다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움직였어요. 제가 좋아서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거든요.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졌다고 할까요. 후다닥 내려가서 스피커나 케이블을 살 수 있는 그런 거?”
전시는 서울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6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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