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트럼프 행정부의 파상공격이 시작되었다. 일찍이 윤석열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방한했던 바이든 전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한미경제동맹’으로 확장하는 명분으로 한국의 반도체산업과 2차전지산업의 미국 이전을 기습적으로 관철시킨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대한 요구조건을 최고수준에서 제시하면서 사실상 국정 공백상태임에도 한국기업과 정부를 서서히 압박하고 있다. ‘준비된’ 트럼프에 비해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한국은 일방적으로 끌려갈 우려가 크다. 트럼프 면담이 불발한 ‘대행체제’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기보다 정권이양을 준비하는 모양새이다. 야당은 헌법재판소를 예상 밖 난제로 만났지만 경제난 극복에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노믹스의 핵심은 관세를 수단으로 하는 미국의 재(再)제조업화라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도 같은 목표를 추구했지만 보조금을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방식 모두 미국에게는 공급망 확충, 경제안보를 강화하는 효과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다만 트럼프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를 사실상 세계에 강매하고 파리협정 탈퇴로 기후위기 대응 의무를 다른 나라들에 전가하려 한다는 점에서 더 노골적이다.
최근 알래스카 주지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알래스카 천연가스를 개발·구매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행태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이다. 첫째, 탈탄소에 역행하는 미국 이기주의의 한 면이다. 미국은 현재 석유, 석탄, 천연가스 3대 화석연료의 매장량 또는 수출량에서 세계 1위이다. 지구온난화로 전 세계 소비가 한계에 이르자 미국은 개발을 촉진하면서 전쟁을 통해서라도 수출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전쟁을 3년 넘게 끌고 있는 이유도, 작금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초토화 작전을 펼치는 이유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천연가스에 대한 수출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미국은 파리협정을 다시 탈퇴하여 화석연료의 계속적인 소비를 고집할 뿐만 아니라 ‘동맹’에게도 자국산 화석연료를 강매하고 있다. 알래스카 주지사는 “알래스카 가스를 구매하겠다는 합의를 먼저 해야 이후 관세를 포함한 여러 사안들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상도의에 어긋나는 월권적 발언을 했다. 셋째, 알래스카 주정부가 사업주체로 나섰으니 한국도 정부가 앞장서야 할 것인데, 국제시장가격보다 값이 2, 30% 비싼 것으로 알려진 알래스카 천연가스를 “친구”에게 강매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이 사업에 한국 정부가 참여한다면 배임행위가 될 수 있다. 넷째, 사실상 ‘강매’하면서 보상이 없다는 단언도 아쉬운 점이다. 알래스카 주지사는 한국은 천연가스를 구매하고 관련 인프라 건설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제성이 확보될 것이므로 별도의 보조금이나 인센티브는 제공되지 않을 것으로 밝혔다. 다섯째, 사업에 미국기업이 참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은 시간을 두고 협상을 해야 함을 보여준다. 여섯째, 대미수출 관세에 관한 협상의 여지가 있다면 권한이 있는 연방정부 대표가 나서야 할 것이고 천연가스 판매 협상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본격적인 협상이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미국정부로서는 미국에 유리한 ‘쪼개기식’ 협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은 미국에게는 절실하지만 한국 말고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 사업이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트럼프의 관세폭탄에 대한 한국기업의 개별적인 대응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10억달러(31조원) 투자계획을 발표했지만 곧바로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25% 관세를 부과한다”는 트럼프 발표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평마저 받고 있다. 분명한 것은 미국 내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기업(현대자동차)일지라도 한국에서 생산된 자동차에 대해서는 트럼프 관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이다. 현대자동차의 대응이 오히려 국내 산업의 공동화와 일자리 축소라는 부작용을 스스로 ‘확정’짓는 결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미국 내 생산을 향후 120만대까지 확대하려면 국내 생산물량이 33만대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직원 4000명과 부품업계 종사자까지 합하면 2만명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90%를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GM이 관세율 25% 부과에 따라 생산량을 대폭 축소한다면 모두 70만–90만대의 자동차 생산 감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관세 25%가 유지되어도 현대자동차는 미국 시장을 계속 확보하는 길이 열리지만 한국경제에게는 성장, 일자리, 세수에서 모두 적지 않은 타격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트럼프식 일방주의에 대응하는 정의선식 ‘통큰 결단’은 물론 일본 이시다 총리의 ‘선제적인 정상회담’도 각개약진으로는 성과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캐나다가 최근 유럽연합 가입을 고려하는 것도 협상력을 높이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지금이라도 현대자동차의 투자계획을 한국의 ‘기여’로 인정받아야 한다. 알래스카 가스관사업은 물론 이미 투자가 이루어진 반도체나 배터리도 실적으로 포함하고 한국이 대미투자 1위의 나라임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씩 협상하기보다 모든 관심사를 다 모아 놓고 일괄타결하는 것이 한국에게는 보다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국내 기업들끼리는 반도체, 조선에서 모두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길’이 기업의 이익과 국익을 병행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차제에 국내 산업을 고임금 숙련공 중심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이 대체불가인 파트너로 미국사업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방위비분담금이나 관세처럼 미국의 강한 압박이 예상되는 부문에서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레버리지’론은 한화오션이 국내 조선 역량을 발판으로 미 해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에 진출할 목적으로 미국 내 필리조선소를 인수하면서 공개한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다만 미국의 기술패권욕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존 펠란 해군장관이 작년 12월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자본과 기술을 미국으로 유치하는 것 매우, 매우 중요하다”고 발언한 바와 같이 미국은 조선산업에서 신기술 이전도 희망한다. 겔싱어 전 인텔 CEO가 대만 TSMC의 1,000억 달러 미국 투자로는 미국의 진정한 반도체 리더십 회복이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연구개발(R&D)이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강조한 것 역시 기술패권욕이다.
내친김에 트럼프와 일괄협상에서 희토류 등 북한의 지하자원을 개발하는데 한국, 북한, 미국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업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그린란드와 관련해서 보이고 있는 기행(奇行)이 희토류 때문이기도 하다면 절박함을 뜻할 수 있다. 전쟁의 근원에는 언제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놓여 있다는 명제는 한반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견지해야 하는 관점은 궁극적으로 주권자의 관점이어야 한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 현대자동차를 방문해서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과 투자를 국민경제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관점에서 재고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부의 조세정책적 지원가능성을 덧붙인 것은 시의적절하다 할 것이다. 기업의 이윤추구와 국민경제의 안정적 성장, 국민생활의 향상이 조화를 이루는 경제는 대외적인 압박이 심한 국면에서도 절실한 목표일 것이다.
김호균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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