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10/07/20241007085513492320.jpg)
[이두수 작가]
지난달까지 일했던 영주에서 전시회를 하자는 제의가 왔다. 영주역에서 전시회를 하면 오가는 사람도 많고 영주를 홍보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다고 해서 흔쾌히 응했다. 역에서 전시를 하는 만큼 역무원들이 일하는 모습의 그림이 몇 점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사진 몇 장을 요구했다. 보내온 사진으로는 그릴 만한 사진이 없었다. 일하는 역무원의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 영화 ‘철도원(뽀뽀야)’에서 역무원으로 나오는 다카쿠라 켄의 뒷모습처럼 그냥 서있기만 해도 오래 역무원으로 일한 완고한 오야지(남자)의 이미지가 보이지 않았다. 역무원만이 아니라 탄핵 정국에서 보여준 장성급 군인들의 모습에서도 진짜 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을 에이브러햄 링컨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인생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이는 나이가 들면서 그가 살아온 태도, 습관, 가치관이 얼굴에 배어 나오므로, 결국 자신의 삶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즉 이 말은 한 분야에서 40년 넘게 일하면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져야 한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오랜 시간 한 분야에서 쌓은 경험과 태도는 얼굴뿐만 아니라 경력과 삶 자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노동으로 30~40년 일했으면 이 분야의 장인이 되어 품위있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건설 노동자는 오래 일해도 노동자로서의 품격이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장인’ 혹은 ‘명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저 그런 노동자’ 혹은 ‘한물 간 노동자’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석공이나 목수 같은 직업이 장인 정신과 연결되긴 하지만 육체노동은 그저 ‘막노동꾼’ 으로 인식될 뿐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제대로 된 유니폼을 입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철학이 없기 때문일까.
우리나라는 일본같이 전통적으로 도제 시스템이 있어서, 건설 기술이 세대 간에 전수되고, 경력을 쌓으면 ‘장인’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없다. 건설현장은 기술이나 기능이 없어도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누구든지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며,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건설업이 운영되면서 체계적인 교육이나 인간적인 기술전수 같은 장인 정신을 배울 기회가 없다. 그래서 건설 노동자가 30~40년 일해도 이를 인증해 주는 제도도 없거니와 그런 경력이나 자격증이 있어도, 실제 숙련도와 경력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문화는 없다.
그래서 건설 노동자는 스스로도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며 사회적으로도 건설 노동자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부족하다 보니, 그냥 ‘오래된 노동자’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의 경험과 경력은 한낱 술자리의 안줏거리나 될 뿐이고 현실은 단순한 하나의 노동인력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여전히 하층민의 일로 여겨지는 경향이 남아 있다. 이러한 인식은 건설 노동자의 자부심과 품격 형성을 가로막는 요인 중의 하나다. 해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공동체를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으로 분석했다. 폴리스에서 노동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활동으로 사적 영역(oikos, 가정의 영역)에 속하지만, 공적 영역(polis, 정치의 영역)에서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정치와 담론을 통해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노동을 천시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노동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반복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즉 밥을 먹기 위해 농사를 짓고 요리하는 이런 행위는 지속적으로 단순 반복되는 행위인 것이다. 두 번째 노동은 노예와 하층민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다. 폴리스에서는 시민(자유인)이 공공 문제를 논의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지 육체노동은 노예나 여성, 하층민이 하는 하찮은 일로 간주된 것이다. 아마 스마트 기술의 발달과 인공지능이 주도되는 사회에서는 인간들이 주로 정치적인 활동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과정치몰입현상은 그 전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양에서도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있어왔는데 이 습속은 요즘 사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육체노동보다는 선비의 학문과 정치를 더 고귀한 일로 여기고 있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가려 한다. 힘들게 일하기보다는 편하게 일하려는 기회를 잡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최고 신분은 법조인이며 정치인이다. 예전 선비들이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며 농사 짓는 농민을 치켜세웠듯이, 요즘 선비들도 노동자의 망치는 판사의 망치와 그 가치가 다르지 않다고 노동자를 치켜세운다.
하지만 노동이 중요하다는 가르침도 존재한다. 예수는 가르침을 전할 때 종종 농부, 목자, 포도원 일꾼 등 노동하는 사람들을 비유로 들어 말씀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전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태복음 13:3-9)로 말씀하였고, 하느님의 은혜와 공의에 대해서는 포도원 품꾼(일용직 노동자)의 비유로(마태복음 20:1-16), 그리고 양치기 목자의 돌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한 길 잃은 양의 비유(누가복음 15:3-7) 등 이러한 비유의 말씀은 노동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체험하는 존재들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이 땀 흘려 일하는 모습 속에서 하늘나라의 원리도 드러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자부심과 자기철학이 필요
노동자도 자기 노동에 대한 자부심과 직업에 대한 자기철학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그냥 노동자’라고 여겼다면 이제부터는 ‘나는 건축을 만드는 전문가다’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장인은 기술만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철학과 직업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배우고 연구하는 자세, 기술뿐만 아니라 일에 대한 철학과 태도를 갖고 있으며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며 체계화하기 위해 자신의 일과 생각을 늘 글로 기록하는 사람이다.
사회나 회사에서도 건설 노동자의 직업 의식을 높이는 교육이 필요하다. 단순히 안전 교육이나 기능 교육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철학과 태도를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숙련된 노동자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경험 많은 노동자가 후배를 가르치고, 스스로도 발전할 수 있는 ‘마스터 시스템’이 필요하다. 일정한 경력을 쌓으면 ‘장인’으로 인정해 주는 사회적 인증이 있으면 좋겠다.
건설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은 직업윤리와 직업의식이 필요하다. 일하면서 윤리의식과 사명감이 부족하면, 결국 그 일의 질이 낮아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그동안 건설 노동자들은 건설 노동을 '단순한 생계수단'으로 여겨왔다. 건설업이 숙련 노동이 아니라 ‘그냥 돈 벌기 위한 일’로만 인식되면서,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나 윤리가 자리 잡기 어려웠다. 그리고 현장에서 직업의식을 가르치는 문화도 없었다. 직업윤리는 교육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데, 건설 현장에서는 그런 걸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그냥 ‘야, 빨리빨리 해’ 이런 식이다. ‘너는 그냥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니, 노동자 스스로도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건설 노동자가 없으면 도시도, 건물도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명품을 만드는 ‘내가 그 전문가다’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원래 직업이라는 보케이션(Vocation)의 의미는 소명의식이다. 소명의식(召命意識, Vocatio)은 근세 종교개혁자인 개신교의 루터, 캘빈주의자들에 의해 직업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보고, 세상의 직업적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소명, calling)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 직업의식을 말한다. 직업을 하느님의 소명이라고 보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직업은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서, 그 직업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지상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며, 또한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서로 다른 재능을 주시고 그 재능에 따라 여러 가지 직업을 정해 주셨으므로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이 소명의식은 돈, 권력, 명예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의 보상으로서의 직업의식이 아니다. 종교적 구원을 목적으로 한 직업의식으로서 성실, 근면, 정직,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으며 신용은 생명이라는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짐으로써 서구의 신용사회와 상도의가 확립된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노동자의 품격
어떻게 하면 건설 노동자도 ‘노동자의 품격’을 갖출 수 있을까
첫째,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을 키우자. 공상적이고 공허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노동을 ‘기술’이자 ‘예술’로 바라보는 태도를 키울 필요가 있다. 노동을 단순 반복의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정신이 담긴 활동으로 볼 때 품격이 생긴다. 둘째, 태도와 행동의 개선이 필요하다. 거친 말과 투박한 태도 대신 정리정돈을 습관화하고, 세밀한 기술적 접근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디테일에 있다. 셋째, 외모의 변화도 필요하다. 후줄근한 냉장고 바지 같은 아무 옷이나 입지 말고 세련된 디자인의 작업복을 입어야 일하는 자세가 달라지고 정리정돈도 잘 한다. 그리고 육체를 써서 노동을 주로 함으로 체력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근대는 개인의 발견뿐만 아니라 신체의 아름다움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근대 스포츠는 여기서 나왔다. 육체미를 보여줄 수 있는 작업장이라면 더 많은 젊은이들이 건설현장으로 찾아올 것이다. 넷째, 우리 스스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유도하자. 건설노동은 '현장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전문가' 또는 ‘공간을 창조하는 예술가이자 기술자’라는 인식을 확산해야 한다. 각자 명함을 만들고 사회인으로 당당하게 자기 소개를 해야 한다. 그리고 ‘건설 노동자의 품격’을 주제로 전시, 강연, 다큐멘터리 같은 다양한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절차탁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학문이나 인격을 수양한다’라는 근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원래 이 용어는 노동용어다. 중요한 것은 이 노동의 용어가 노동자를 지칭하는 말이 된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들의 용어가 된 것이다. 지금도 생산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성실히 일하는 작업에 대해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선 자신이어야 한다. 사회에서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집을 짓는다는 자부심, 가장 위험하지만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존감, 그래서 나는 최고의 노동자라는 자긍심, 이런 것이 우리 건설 노동자들에게 필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동은 오랫동안 천시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시대적 인식의 산물일 뿐, 본질적으로 노동은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다. 노동자의 손길이 없다면 이 세상의 어떤 건물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짓는 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담는 공간이다. 그 가치를 기억하며 노동의 품격을 스스로 높여가면 좋겠다.

[사진=저자 제공]
그림설명: 피곤한 노동자 얼굴 형상이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지만 지친 얼굴을 그려 보았다. 매일 일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읽고, 그리고, 쓰기를 하다 보면 노동이 예술이 될 것이라 믿는다. 누가 아는가. 이 그림이 에곤 실레의 자화상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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