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원 논설위원장]

세계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글로벌 시장은 격변기를 맞고 있고, 지정학적 불안정성은 심화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표방한 ‘미국 우선주의’에서 비롯된 이른바 ‘미국발 대혼란’이다. 지난 1월 트럼프의 두 번째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무차별 관세 인상 정책은 세계에 큰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긴장에 더해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고, 유럽의 정치적 불안이 커지고 있다. 지난 3개월간 미국의 경제정책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관세정책을 중심으로 한 보호주의적 접근이 강화되면서 이것이 무역전쟁에서 금융시장으로의 영향을 확대시키는 형태로 '금융전쟁'이라 불리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이런 미국발 대혼란 속에서 한국은 지난 4개월 동안 극도의 정치혼란에 빠져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엄정국-탄핵정국-헌재정국-파면정국-대선정국으로 이어지며 격렬하게 요동치는 정국이 세계 주요 미디어의 톱뉴스로 연일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혼란은 독특한 우리의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과거부터 사상가와 학자들은 ‘시대정신(Zeitgeist)’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다. 시대정신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사회적, 지적 경향을 설명할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시대정신의 개념은 요즘과 같은 전환기, 격변기 또는 문화적 변화의 시기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특정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 신념, 가치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정신에 대한 논의는 철학과 역사를 넘어 마케팅, 기술, 정치 분석과 같은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정치 지도자는 시대정신을 이해함으로써 큰 혜택을 볼 수 있다. 집단적 사고방식에 적응함으로써 대중에게 공감할 수 있는 정책과 메시지를 만들 수 있다. 시대정신을 무시하면 손에 닿지 않거나 비효율적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사회 개혁가, 활동가, 혁신가들은 종종 자신의 행동을 시대정신과 일치시켜 추진력을 얻는다. 마틴 루서 킹 같은 사상가나 스티브 잡스 같은 기술 리더들은 시대정신을 활용해 변혁을 주도했다. 시대정신에 대한 인식은 불필요한 마찰을 방지할 수 있다. 기존의 정신에 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리더나 조직은 대중의 반발에 직면하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의 경우 시대정신을 인식하면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사회적 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문화, 기술 또는 정치의 변화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적응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복수의 AI(인공지능)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아 정리해 봤다. 이 시대의 글로벌 시대정신은 급속한 기술 발전, 환경의 시급성,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의 증가로 정의되는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AI 통합 추진, 기후변화 대응, 제도적 격차 해소 등 진보와 보존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시대정신은 정치와 경제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이는 사회적 가치와 국가적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시대정신은 선거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며, 정치적 리더와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2002년 한국 대선에서는 '정치 개혁'과 '세대교체'가 시대정신으로 작용했으며, 2007년에는 '경제성장'이 중심이 되었다. 시대정신이 공정성과 통합을 강조할 경우 사회 갈등을 완화할 수 있지만,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 불안과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또 시대정신은 정부의 역할을 재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강하고 유능한 정부'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시장 규제와 국민의 안전 보장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울러 시대정신은 경제 정책의 우선순위를 설정한다. 복지국가와 공정한 분배를 강조하는 시대정신은 신자유주의 모델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 전략을 요구한다. 자산 불평등과 삶의 질 양극화는 시대정신에 의해 해결책이 제시되며, 이는 경제 정책에서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 한편 제4차 산업혁명과 같은 기술 변화는 새로운 산업화를 선도하며, 시대정신은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
이같이 세계에 통용되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특히 인구문제, 사회경제적 격차, 지역소멸, 격심한 정치 분란 등 전례없는 혼란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꼭 주지해야 할 시대정신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한국의 시대정신은 인구학적 위기, 사회경제적 도전,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독특하게 형성되었다. 한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노동인구 감소로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경제적 안정을 위협하고 주거비, 성 불평등, 일과 삶의 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한 정책 개혁을 촉발시켰다. 팬데믹으로 인한 소득 불평등과 임시직 고용, 부의 집중과 같은 구조적 문제로 인해 사회경제적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화되고 행정 개혁이 균형 발전을 이루지 못하면서 지역 해체는 또 다른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양극화와 이념적 충돌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하는 극심한 분열에 직면해 있다.
특히 민주주의 피로와 정치적 양극화는 최대 난제로 꼽힌다. 제도권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고 있고,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 대해 냉소적이며, 정치 담론은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승리에만 집중한다. 세대와 지역 간 이념적 분열이 심하다.
한편 한국은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교육, 노동, 복지 등 사회 시스템은 이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기회와 불안정성을 동시에 낳는다. 한마디로 '위기 속의 압축된 근대성'이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은 빠르게 근대화를 이뤘지만, 그 속도만큼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압박을 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시대정신은 한편으로는 문화적 활기와 기술력,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구조 변화, 정치적 불안정, 사회경제적 불평등 등 대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압박과 씨름하는 한국이 적응하고 공통점을 찾는 능력에 따라 21세기에 회복력 있는 리더로 부상할지 아니면 분열의 무게에 계속 흔들릴지 결정될 것이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시대정신은 불확실성이 점점 더 커지는 세상에서 변화를 헤쳐나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제 정치 지도자에게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유권자를 소외시키고 관련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 시대정신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는 리더는 기후 변화, 사회 정의 또는 기술 혁신과 같은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면 리더는 대중에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만들어 신뢰와 참여를 촉진할 수 있다. 시대정신에 익숙한 지도자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같은 역사적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의 정서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전략을 조정할 수 있다. 대공황 시기의 루스벨트와 디지털 운동 부상기의 버락 오바마가 좋은 사례이다.
지도자는 현재를 이해하고 상황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지도자는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답변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미래를 구상하고 창조해야 한다. 좋은 리더는 더 나은 내일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로드맵을 개발한다. 로드맵은 구상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계획을 나타낸다. 비전과 로드맵은 리더가 집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결정을 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좋은 리더는 자신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오늘날의 도전 과제 중 하나가 명확한 공통 시대정신의 부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시대정신이 확산된 시대에 살고 있다. 리더는 분열을 막고, 불안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편안함과 마음의 평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오늘날 기회의 세계를 포용하기 위해 지원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발전의 일부이며 집단이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리더는 '함께 발전한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야 한다.
흔히 세계 정치가들 가운데 국가통치와 정권운영에 있어서 '시대정신'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시대정신은 정치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강력한 힘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정책과 수사를 기존의 문화, 경제 또는 사회적 흐름에 맞춰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활용해 경제 개혁과 사회 보장에 대한 대중의 요구에 공감했다.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와 같은 지도자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시대에 화해와 정의의 시대정신을 구현했다. 이러한 성공사례는 명확한 비전을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리더의 능력에 달려 있다. 민심의 물결을 타고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국가의 배를 조종하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지금 한국은 이러한 도전을 넘어 회복 탄력성과 혁신의 빛을 찾아야 할 때다. 시대정신을 무시하는 지도자와 정부는 생존하기 어렵다. 성공한 정부는 시대정신을 활용한다. 하지만 시대정신이란 특정 시기에 사회 구성원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견해와 신념의 집합이다. 지도자의 신념도 포함된다. 시대정신을 잘 간파하고, 이를 당차게 이끌고 갈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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