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의 중동워치] 북아프리카에서 바라본 시칠리아…역사와 문화의 용광로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로마 중심의 유럽의 시선으로 보면 시칠리아는 낙후되고 되먹지 않게 자존심만 강한 문제 많은 섬이다. 시칠리아를 떠올리면 대부와 마피아가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도 이런 정서 때문일 것이다. 반면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이슬람의 시선으로 보면 시칠리아는 그야말로 가장 아랍다운 섬이고, 수준높은 문화와 지식정보를 업데이트해서 유럽을 일깨운 르네상스의 산실이자 스승이다. 유럽 지중해 음식문화의 일상이 되버린 오렌지, 레몬, 라임, 사탕수수, 시트러스, 대추야자 등의 신작물과 커피, 피자, 시럽, 셔벳 등의 신음료들은 그 명칭이 대부분 아랍어일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를 통해 시칠리아에 전해졌고, 이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단순한 생활 문화만이 아니라. 아랍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축적해 놓았던 천문학, 화학, 물리, 연산법, 대수학, 연금술 같은 학문도 톨레도나 시칠리아 같은 아랍 통치권을 통해 유럽사회에 이식되어 항해와 시간 측정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나트(Qanat)라 불리는 지하수로를 활용한 관개 기술과 농업 혁명을 통해 남부 유럽인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이러한 문명의 혁신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260년간 이 섬을 지배했던 이슬람 왕국인 시칠리아 에미리트(831~1091)가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통치영역이었던 시칠리아 섬은 956년 동북쪽 요새도시 로메타(Rometta)가 아랍에게 넘어감으로써 이슬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시칠리아의 이슬람 왕국은 팔레르모를 수도로 정하고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이 공존하며 독특한 문화 융성과 학문적 번영을 이끌었다. 그러나 모든 문명 제국이 그러하듯이 시칠리아의 이슬람 에미리트도 11세기 초부터 급격한 내분과 권력투쟁으로 약화되면서, 북부에서 침공해 온 노르만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이로써 260년 시칠리아의 무슬림 지배는 종식되고 기독교 노르만 왕국(1071~1194)이 탄생했다. 아랍과 이슬람 문화의 영향은 양 제국의 수도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시칠리아나 전역에서 언어생활, 농업 작물과 기술, 건축 등에서 지금까지 강한 잔재를 남기고 있다. 시칠리아 섬을 새롭게 차지한 노르만 왕국은 이슬람 왕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관용과 공존 정책으로 무슬림 두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지만 13세기 중반 이후 박해정책으로 무슬림 대다수가 섬을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시칠리아의 이슬람 전통과 주민들은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유럽 르네상스의 산실로서 시칠리아
 
950년경 이슬람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 도착한 바그다드 출신의 아랍 상인 이븐 하우칼(Ibn Hawqal)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는 번성했고, 과거 로마 대성당 자리에는 그랜드 모스크가 들어섰다고 전한다. 도시에는 목욕탕, 모스크, 관공서, 감옥소 등이 있었고 정육점만 해도 150여개에 약 7천명의 종사자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알 마크디시를 비롯한 아랍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11세기 팔레르모 인구는 약 35만명에 이르렀다.
 
이슬람 왕국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딤미(Dhimmi)’라 불리는 전통적인 소수민족 보호 정책에 따라 인두세(Jizya)를 내는 조건으로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11세기말 노르만 왕국이 다시 시칠리아를 점령할 당시까지 시칠리아 전체 주민의 약 절반 가량이 무슬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미르라 불리는 이슬람 군주는 행정의 최고통치자와 종교적 통수권을 가진 초월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으며 지방에 총독을 임명해서 지방 분권화를 꾀했다. 카디(판사)를 임명해서 독자적인 이슬람 율법에 따른 판결을 장려했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무슬림 지식인들은 통치자의 보호아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보존하고 확장했으며, 수많은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시칠리아의 이슬람 문명이 남긴 남긴 문화적, 지적 유산은 후일 북쪽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르네상스가 발아하고 성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슬람 통치 시대를 이어 노르만 왕국의 시대에 왔어도 두 종교와 두 문화의 융합 정신은 지속되었다. 노르만인, 유대인, 무슬림 아랍인, 비잔틴 그리스인, 룸바르드인, 시칠리아 토착인들이 서로 섞여 큰 차별없이 조화를 이루는 시대였다. 정부와 행정부의 공식 용어는 적어도 1세기 동안 아랍어 였다. 아랍어의 영향은 지금도 시칠리아와 몰타의 언어에 강한 영향을 남기고 있다. 그렇지만 왕조의 몰락이 초래하는 당연한 귀결로 패자의 선진 문명과 종교적 정체성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특히 1189년 윌리암 왕의 사망 이후 소수 종파에 대한 보호정책 마저 무력화되면서 시칠리아 섬에 잔존해 있던 무슬림들의 생존은 심각한 위협에 봉착했다. 살아남은 무슬림들은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선택당했고, 그리스 정교회와 성직자들 조차 라틴 교회의 권위 속으로 강제되었다. 노르만 왕국은 그리스 주민들을 라틴화 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북서부와 프랑스 남부 등지에서 수천명의 이주민들을 정착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1282년 경에는 시칠리아 섬에 무슬림 공동체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섬 전체의 라틴화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팔레르모 대성당 쿠란 기둥 사진저자 제공
팔레르모 대성당 쿠란 기둥 [사진=저자 제공]

두 문명의 중심지 팔레르모
 
시칠리아의 수도였던 팔레르모 중심에는 대성당이 자리한다. 팔레르모 대성당은 1184년에 완공되었지만, 시대를 달리하는 다양한 양식들이 절묘한 대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서에 고딕 첨탑이 서 있고, 중앙에는 바로크 스타일의 녹색 돔이 성당의 위엄과 우아함을 돋보이게 해준다. 건물 전면의 전체적인 구조는 노르만 시대의 흔적이 강하고, 정교하게 홈을 파서 조각하듯이 올린 아치를 비롯한 세부적인 장식에서는 아랍풍을 따랐다. 남쪽 면의 벽시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정교한 부조와 1426년에 제작된 마돈나의 황금 모자이크 상, 18세기 신고전주의풍으로 꾸며진 성당 내부 장식에 이르기까지 흡사 건축 박물관에 온 느낌이다. 당연히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런 가치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대성당 기둥에 새겨져 있는 쿠란 구절이다. 상식 밖이고 보기 드문 광경이다. 본래 팔레르모 대성당 자리에는 그랜드 모스크가 있었다. 234년간(827~1061)이나 아랍이 지배하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유려한 아라베스크 문양 사이의 기둥에 새겨진 쿠란 구절을 가리키며 “왜 신성한 성당에 이교도의 성서 흔적을 치우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안내를 맡은 수녀님의 대답은 “그 의미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펼치려는 내용이라니, 아랍어를 읽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쿠란 7장 54절의 말씀이다.
 
"진실로 당신들의 주님은 여섯 날 동안 천지와 대지를 창조하시고, 그 후 왕좌에 앉으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밤으로 낮을 덮으시니, 밤이 쉴 새 없이 낮을 뒤쫓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어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창조와 명령은 그분의 것입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하나님은 지극히 복되십니다."
 
이 기둥 자체는 로마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잔틴 시대의 바실리카의 일부였을 것이다. 15세기 대성당 입구의 고딕 양식 현관을 건설할 때 이 기둥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실 수녀님의 이 대답 하나만으로도 팔레르모 도시의 성격은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는다.

 
신라고지도 사진저자 제공
신라고지도 [사진=저자 제공]

12세기 시칠리아에서 제작된 신라고지도
 
더욱이 팔레르모가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역사적 의미도 한번쯤 되새길 필요가 있다. 중세 최고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도상 전문가였던 알이드리시(Al-Idrisi)가 활동하던 도시였다. 그는 노르만 왕 로저 2세의 명을 받고 당시 가장 정교한 세계지도를 제작해 바쳤다. 세계를 70개 부분으로 분류하여 제작하였고 각각의 지리적 환경과 주변 국가들의 정보를 세세하게 기록했다. 놀랍게도 그 지도에는 신라도 6개의 섬으로 또렷하게 표시되어있다. 아마 코리아를 묘사한 최초의 지도일 것이다. 코리아를 반도가 아닌 섬으로 묘사한 것은 아랍상인들이 중국 동남부 해안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해 곧장 흑산도까지 왔고, 다시 대한해협을 따라 울산(개운포)을 통해 경주에 도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알이드리시는 또 다른 책에서 신라의 생활상과 풍성한 황금 문화를 자세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노르만 왕국의 문화 융합정책으로 팔레르모는 어디를 가도 공존의 빛이 흐른다. 내게는 친숙한 아랍의 어느 골목과 크게 다르지 않다. 2층 발코니를 도로 쪽으로 튀어나오게 하여 이웃과 빨래를 공유하는 아랍식 목조 건물이 펼쳐져 있고, 하얀 아라베스크 문양의 철제 창살이 이색적이다. 건물 하나하나는 제각각이지만 시대정신을 차곡차곡 담고 있다는 특성이 돋보인다. 노르만 시대 예술의 진수라는 로저 2세 왕궁이었던 산 조반니 델리 에레미티 수도원, 몬레알레 수도원, 벨리니 광장의 산 카탈로교회 모두 아랍시대 건축물을 개조한 융합건물이다. 문화 다양성이 주는 예술의 걸작은 국립미술관에 있는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1476년 작품 ‘성모의 수태고지’에서 절정을 이룬다. 서양의 얼굴에 동양의 겸양, 이슬람 풍 푸른 차도르를 쓰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성모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기 힘든 감동이다. 팔레르모 문화라는 새로운 공존의 실험은 13세기 전반에 시칠리아의 국왕이 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이후 관용의 문이 닫히면서 쇠락했다. 비록 다른 이탈리아에 비해 좀 뒤처져 있지만, “인생은 고달프지만 동시에 즐길 만한 것이다”는 시칠리아 인들의 인생에 대한 여유는 부럽기만 하다. 시칠리아는 내게도 유럽 중심의 문화권으로 보아왔던 좁은 시각을 넘어 통합 문화의 용광로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 스승이었다.

 


필자 주요 이력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국내외 저서 9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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