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칼럼] 한·러 관계 회복, 직항 운행부터 재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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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들어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종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는 국제사회에서 평화 협상이 화두가 되었고 종전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분위기가 바뀐 결과 요즘 한국뿐만 아니라 러시아 매체들도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한국 기업들의 움직임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의 중앙은행을 비롯하여 주요 은행들과의 거래를 금지하였고, 총 1402개 품목(HS 6단위)에 대해 수출을 통제함으로써 대러 수출이 급감하였으며 통제 대상이 아닌 상품 수출의 경우에도 금융거래의 제약 때문에 우리 기업들이 수출 대금을 받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삼성전자, 현대차·기아 등 현지에 투자한 업체들은 조업을 중단하였다가 2023년 말에 환매조건부라고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러시아 측에 자산을 팔고 철수하였다. 양국 간 직항노선도 전쟁 직후 폐쇄되어 러시아를 왕래하는 국민들은 비행기를 바꿔 타야 하는 관계로 불편을 겪고 있다. 국제사회의 분위가가 바뀌었음에도 한국 정부가 대러 제재의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데 당장 수출통제를 풀고 금융거래를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겠으나 가능한 한 대러 제재의 완화 또는 해제를 검토할 상황이라 생각된다.
 
지난 1월 말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는 다음 달인 2월에 대러 제재 해제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관련 부처에 대해 제재 해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하였으며, 양국 정부는 양국 관계 회복의 첫 단추로 상대국에 있는 자국 외교공관의 업무를 정상화하는 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도 크게 바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지난 2월 유엔총회에서 우크라이나가 발의한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고 안보리에서는 ‘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 당사국들의 협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의 행동을 ‘침공’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더욱이 지난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시한 평화안을 보면 크림반도에 대해 러시아의 법적 권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에 대해서도 사실상 현 상황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의 종전 조건을 거의 다 수용하여 이른 시일 내에 상황을 종결짓고, 그럼으로써 대러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방침을 확고히 갖고 있는 것 같다.
 
러시아에 투자하였다가 철수한 한국 기업들의 복귀에 대해 국내 일부에서는 우리 기업들이 원하면 문제 없이 복귀할 수 있을 것처럼 보는데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우선 환매조건부 계약의 유효기간이 올해 말까지인바 평화 협상이 아무런 진전 없이 올해를 넘기게 되면 그 계약은 실효될 것이며 올해 안에 환매 옵션을 행사하는 경우에도 최근 러 측의 동향을 보면 만만치 않을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은 최근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에서 철수한 서구 기업들이 ‘헐값(throwaway price)’에 매각한 자산을 저렴하게 되찾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는바 한국 기업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 측은 생산 현지화, 기술 이전 및 낮은 가격에 매각하였던 자산에 대한 ‘완전한 시장 가격(full market price)’ 지불 등을 조건으로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복귀를 원하는 기업들의 정부에 대해 점령지에 대한 러시아의 권리를 인정하라는 요구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철수했던 기업들의 복귀에 있어 러시아가 ‘을’이 아니라 ‘갑’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현재로선 한-러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해 볼 만한 일이 전혀 없는 것인가? 2013년 11월 푸틴의 방한 때 체결되어 2014년 1월 발효된 비자 면제 협정은 한국이 러시아에 제재 조치를 취하여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 명단에 올렸어도 현재까지 중단 없이 시행되고 있다. 이는 양국 정부가 국민들의 상호 방문 또는 교류를 제한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직항 운행의 중단으로 여러 분야에서 양국 국민 간 교류는 크게 위축되었다. 오늘날 통신이 발달하여 쉽게 비대면 접촉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든지 사람들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데 있어 직접 대면 접촉보다 나을 수는 없다. 러시아 현지 투자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에 복귀하려면 러시아 파트너들과의 대면 접촉을 통한 소통이 절실한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정부가 정책적으로 양국 국민 간 교류를 규제하고 있지 않으면서 직항 운행의 중단 상태를 장기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은 조치이다. 유럽 러시아 지역 도시의 경우는 중국, 중앙아시아 또는 중동을 거쳐서 갈 수 있어 환승에 따른 불편이 덜하나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유즈노사할린스크 같은 극동 러시아 도시들을 방문하려면 황당한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예를 들면 환승 항공편이 여의치 않아 평소 같으면 2시간 남짓 걸리는 곳을 배편으로 1박 2일 걸려 가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이 지역들에는 고려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데 정부가 재외동포청을 만들 정도로 재외동포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겪는 불편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러 제재의 목적은 러시아가 무기를 생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물자를 확보하지 못하게 하거나 전쟁 비용 마련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직항 운행의 중단은 대러 제재에 큰 의미가 없고 러시아를 왕래하고자 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추가적인 비용과 불편을 야기할 뿐이다. 이제 전쟁이 평화 협상 국면으로 전환된바 교류 회복을 위해 선제적인 조치를 취할 때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러 측이 공식적으로 우리 측에 제의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주한 러시아 대사가 러 측의 희망을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다. 러시아가 우리의 대외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 중국, 일본 및 유럽연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지만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1억4000만 인구를 가진 러시아 시장을 방치할 수는 없다. 미국의 대러 관계 회복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기민하게 대러 정책의 변화를 꽤해야 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학교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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