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준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헌법재판관의 주문을 듣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다. 윤석열은 판결 승복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있고, 그의 지지자들은 ‘윤어게인’을 외치며 언제라도 모종의 음모를 획책할 태세이고, 집권 여당은 대통령 파면의 책임을 지고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곱씹고,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한 의지와 과제 그리고 이 땅의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그 지난한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맞았다.
왜 대통령 파면의 불행한 역사는 반복되는가? 왜 우리는 파면당할 수준의 대통령을 선출했는가? 왜 파면당한 대통령이 모두 보수 여당의 후보였는가? 대통령의 전횡과 파면을 막기 위한 근원적인 대책은 무엇인가? 보수 여당의 근원적인 문제를 진단하면서, 필자는 세 각도에서 대한민국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당정치의 실종 혹은 부실이다. 윤석열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한 번도 정치인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의 권한을 한없이 누렸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파멸하는 과정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또 하나의 비극을 낳았다.
박정희 군부 독재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필자의 기억에 학교는 언제나 병영과 같았고, 사회는 근대화(경제성장)와 민주화의 갈등 속에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국민의 기본권은 압살되었고, 정부 여당은 대통령의 시녀로서 민주주의를 시늉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야당은 민주화 투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됐고, 그들의 독재 타도 투쟁은 87 민주화 투쟁으로 결실을 보았다.
정치적 민주화는 지역주의에 기초한 총재 정치를 낳았다. 여당은 여전히 독재적 정치문화의 그늘 속에서 음산한 반민주적 행태를 유지했고, 야당은 호남의 김대중, 영남의 김영삼, 충청권의 김종필이 지역의 맹주로 군림하며 정치적 지분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총재의 권력놀음을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민주주의가 직선으로 발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재현되는 중이다. 국민의힘의 경선은 이미 한덕수와 단일화를 전제로 한 예선전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부끄러울 정도의 치졸한 권력 추구의 행태를 보이며 자기 당의 대통령 후보를 당당하게 본선에 내보내지 못하는 정당을 어찌 공당이라 할 수 있을까?
둘째, 윤석열 파면의 정치적 기원은 ‘정치의 사법화’에 있다. 그 중심에는 검찰 권력의 정치화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검찰 출신 법무부 장관 김기춘이 남긴 희대의 어록이다. 지역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검찰 권력이 정치를 넘보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과거 독재 정부의 권력자들은 정보기관(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과 경찰(치안본부)을 동원해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실현으로 정보기관과 경찰의 힘이 빠진 틈을 타서 권력기관으로 올라선 기관이 바로 검찰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검찰이 사회적 공익을 실현하는 기획 이벤트로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스타 검사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고, 그들의 경력은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스펙이 되었다. 홍준표는 대표적인 검사 출신 정치인의 모델이 되었다. 검찰은 스스럼없이 정치적 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으로 특정 정치인을 옭아매려 했다.
판사 출신 여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 역시 상대 후보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사법적 공격으로 정치적 금도를 넘었다. 그는 당시까지 불문에 부쳤던 정치 자금에 대한 수사로 김대중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이후 검찰은 대통령의 임기 말에 이르면 으레 정치권 수사에 나서 총선이든 대선이든 당락의 향방을 가르는 기준을 제시하려 하는 한편 재계의 비리 수사에 착수하여 선거판의 유불리를 재단하는 무리수를 기꺼이 자처했다.
정치적 금도를 무시하는 정치 검찰의 행태는 끝을 모른다. 그러나 무리하면 탈이 나는 게 세상 이치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야당 후보 이재명을 정치적 사망 선고에 이르게 하려는 검찰의 시도는 급기야 윤석열의 파멸을 자초했고, 이재명에게는 정치적 부활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효과를 내고 말았다. 윤석열 파면에 관한 헌법재판소 결정문의 포괄적 취지는 ‘정치는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하라는 주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정치를 부정하며 권력을 휘두른 검찰주의자 윤석열의 파멸은 애초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여당 정치인의 무책임을 들 수 있다. 윤석열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 지금도 이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대통령 윤석열에게는 철학도 비전도 없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그래서 정치를 거부했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면, 여소야대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권력으로 의회를 누를 수 있다고 착각했다. 계엄이 초래한 경제적 부작용으로 여전히 수많은 국민들이 경제적 고통 속에 신음하지만 그는 한 번도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홍준표의 사례를 보자. 그는 대구시장직을 버리고 다시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검사 출신 정치인으로서 홍준표의 이력은 화려하다. 다선 의원과 여당 대표를 거친 대선 후보, 이에 더해서 경남도지사와 대구시장을 역임했다. 혹자는 그를 성공한 정치인으로 평가할지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는 어리석은 유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권력 놀이에 빠진 정치인의 한 명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가 그렇게 야박하게 평가하는 이유는 정치인의 책무를 가볍게 여기는 그의 태도에 있다.
그는 경남도지사 시절 진주의료원의 문을 강제로 닫아버렸다. 적자 운영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공공병원은 지역의 경제적 약자를 위한 의료시설로서 어느 정도의 적자 운영이 불가피하다. 이는 지역 의료원들이 코로나19 사태 당시에 맡았던 역할을 떠올려봐도 자명하다. 그 진주의료원은 2028년 재개원을 목표로 건설에 착수했다. 이는 그가 지자체장으로서 지역민의 삶을 돌보지 않고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 하나의 사례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홍준표는 대구시장으로서 최근까지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통합을 밀어붙였다. 백번 양보해서 지자체장으로서 지방 살리기라는 정치적 명분을 내밀어 시도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불순한 의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애당초 그는 대구시장에 당선되자마자 통합을 추진하는 부서를 폐지할 정도로 통합반대론자였다. 하지만 2년 만에 변변한 이유도 없이 통합찬성론자로 돌변하여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여론 수렴을 생략하는 반민주적인 행태도 드러냈다. 그런데 대선 정국이 열리자마자 대구시장직을 팽개치고 통합 추진은 슬그머니 사라졌고, 그에 대해서 한마디 변명도 사과도 없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려는 자의 품격에 심히 의심이 간다.
한동훈, 한덕수, 김문수 등 여권의 대선 주자들은 한결같이 정치적 무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계엄과 내란의 부당함을 인정하면서도 내란 세력과 결별하지 못하는 한동훈, 평생 양지만 좇으면서 관료적 권위를 쌓은 한덕수가 내란 공범의 혐의자로서 국민에게 보여주는 야비한 행보, 노조운동가로 입신해 극우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문수가 보여주는 정치적 가벼움과 무모함은 보수 정당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국가에서 정당은 정치권력을 품는 산실이다. 정당이 기획하고 생성하는 정책은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정당이 불나방이 모여드는 ‘떴다방’처럼 운영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입증하는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왜 믿음직한 100년 정당이 없을까?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지속 가능한 정치적 플랫폼으로서 정당이 확립되고, 그 속에서 정치인이 성장하는 문화가 정립될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오늘의 질곡에서 벗어나리라.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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