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혁 칼럼니스트]
지난달 하순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 등 영남권을 휩쓴 산불의 피해가 막심하다. 83명이 숨지거나 다쳤고 35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시설 피해액은 1조원이 넘고 10만4천 헥타르(ha)에 가까운 산림이 불탔다. 피해 면적이 서울의 1.6배에 달한다. 그동안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2000년 강원도 동해안 산불보다 4배 이상 큰 규모라니 최악의 산불이었다.
역대급 초대형 산불이 말 그대로 영남의 산들을 초토화시켰다.
오죽하면 괴물 산불이라고 했을까. 강풍을 타고 초고속으로 확산된 속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자연이 받은 상처도 깊고 그 자연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과 동물들도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산불의 원인은 성묘객이 일으킨 실화, 예초기 불씨로 인한 발화 등으로 밝혀졌으니 명백한 인재(人災)다. 인간의 실수로 생겨난 작은 불씨가 영남의 산림을 불바다로 만든 것이다.
사서삼경의 하나로, 고대 중국의 정치 문서를 편집한 《서경(書經)》의 '반경(盤庚)'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쁜 소문이 번져가면) 마치 들판에 불이 붙은 것과 같아서(若火之燎于原),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데 어찌 그것을 박멸할 수 있겠느냐(不可嚮邇 其猶可樸滅)." 은나라 임금 반경이 수도를 옮기려고 하는데 반대 여론이 높자 뜬소문을 퍼뜨려 백성을 불안하게 한 조정 대신들에게 한 말이다. 즉 뜬소문(浮言)이 번져가는 것은 마치 들판에 불을 붙여 놓은 것과 같아 아무도 근접할 수 없으니 그 불을 끄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고사에서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는 성어 '성성지화 가이요원(星星之火 可以燎原)'이 유래되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소홀히 다루면 크게 번져 넓은 들판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듯이, 사소한 일이라도 처음 잘못 다루거나 방치하면 나중에 큰 재앙이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국공내전의 와중에 마오쩌둥이 이 '성성지화 가이요원'을 소환했다. 1927년 1차 국공합작 결렬 후 각지에서 일으킨 무장폭동이 국민당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 열세로 실패로 돌아가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천험의 요새 장시성(江西省) 징강산(井岡山)에 혁명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지리멸렬해 있던 홍군을 수습해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징강산이 '혁명의 요람'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징강산의 현실은 참담했다. 병사들은 겨울옷이 없어 한겨울에도 여름옷에 짚신을 신어야 했고 군량도 태부족이었다. 설상가상 당 중앙은 농촌 지역에서의 무장투쟁 확대를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렸다. 마오는 혁명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성성지화 가이요원'을 인용하여 중국 혁명의 가능성을 역설했다. 중국 전역이 마른 장작으로 가득찬 것과 같은 형세이니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듯 지금은 미미해 보이는 혁명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당 주도권을 쥔 마오쩌둥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혁명의 요람 역할을 한 징강산은 성지가 되었다. 징강산시 중심 교차로에는 대형 마오쩌둥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 앞 조형물에는 '星星之火 可以燎原' 여덟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신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언어의 마술사요 소통의 달인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속담과 격언을 활용하여 메시지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해박한 중국 고전에 기반한 레토릭과 언변으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어 무력의 열세를 뒤집고 천하를 쟁취했다. 문화혁명 때는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단 네 글자로 홍위병을 격동시켜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일인 지배 체제를 공고히 했다. '권력은 총대에서 나온다(槍杆子裏面出政權)' 역시 마오가 남긴 숱한 어록 중 하나지만, 마오의 천하 패권 장악에는 총대(槍杆子)뿐만 아니라 붓대(筆杆子), 즉 문장력도 큰 몫을 담당했다.
일제 패망 직후 장제스가 마오쩌둥을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초대했다. 마오로서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적지(敵地) 방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춥고 배고프고 앞날이 불투명하던 옌안(延安) 시절, 폭설이 내린 어느날 새벽에 마오가 역사 속 천하의 주인공들을 회고하고 이 시대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호연지기를 드러낸 사(詞)를 썼다. <심원춘•설(沁園春•雪)>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이 글이 마침 마오가 사즉생의 각오로 충칭에 가 있는 동안 당대의 애국시인 류야쯔(柳亞子)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폭발한 것이다. 덩달아 마오의 존재감이 장제스를 능가하며 중국 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항우가 유방의 목숨을 노린 '홍문연(鴻門宴)'에 비견될 이 충칭회담 조차도 마오의 문재(文才)가 널리 알려지고 성가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니 장제스로서는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닌가 싶다. 마오쩌둥의 시대가 저문 지 오래됐어도 중국 공산당 집권세력은 여전히 마오의 어록을 적재적소에 차용해 정책의 논거로 삼는다.
'성성지화 가이요원'은 마오쩌둥으로 인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울러 작은 시작이나 힘이라도 무시할 수 없으며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격려의 의미가 추가되면서 상황에 따라 경계의 메시지로 또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로 활용되고 있다. 흔히 네 글자로 줄여 '성화요원(星火燎原)'으로 쓰인다.
자연의 영역에서든 인간의 영역에서든 작은 불씨는 큰 불로 번지기 십상이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고 산림을 태우고 세상을 태운다. 인간의 실수와 부주의로 발화한 작은 불씨가 영남의 산들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화력이 월등한 국민당군에 쫓기며 지리멸렬하던 마오쩌둥과 홍군은 혁명의 작은 불씨를 키워 온 세상을 태우고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 영남 산불은 어렵사리 진화되었지만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산불 소식이 들려 온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던 어릴 적 표어가 부쩍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역대급 초대형 산불이 말 그대로 영남의 산들을 초토화시켰다.
오죽하면 괴물 산불이라고 했을까. 강풍을 타고 초고속으로 확산된 속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자연이 받은 상처도 깊고 그 자연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과 동물들도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산불의 원인은 성묘객이 일으킨 실화, 예초기 불씨로 인한 발화 등으로 밝혀졌으니 명백한 인재(人災)다. 인간의 실수로 생겨난 작은 불씨가 영남의 산림을 불바다로 만든 것이다.
사서삼경의 하나로, 고대 중국의 정치 문서를 편집한 《서경(書經)》의 '반경(盤庚)'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쁜 소문이 번져가면) 마치 들판에 불이 붙은 것과 같아서(若火之燎于原),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데 어찌 그것을 박멸할 수 있겠느냐(不可嚮邇 其猶可樸滅)." 은나라 임금 반경이 수도를 옮기려고 하는데 반대 여론이 높자 뜬소문을 퍼뜨려 백성을 불안하게 한 조정 대신들에게 한 말이다. 즉 뜬소문(浮言)이 번져가는 것은 마치 들판에 불을 붙여 놓은 것과 같아 아무도 근접할 수 없으니 그 불을 끄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고사에서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는 성어 '성성지화 가이요원(星星之火 可以燎原)'이 유래되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소홀히 다루면 크게 번져 넓은 들판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듯이, 사소한 일이라도 처음 잘못 다루거나 방치하면 나중에 큰 재앙이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국공내전의 와중에 마오쩌둥이 이 '성성지화 가이요원'을 소환했다. 1927년 1차 국공합작 결렬 후 각지에서 일으킨 무장폭동이 국민당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 열세로 실패로 돌아가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천험의 요새 장시성(江西省) 징강산(井岡山)에 혁명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지리멸렬해 있던 홍군을 수습해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징강산이 '혁명의 요람'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징강산의 현실은 참담했다. 병사들은 겨울옷이 없어 한겨울에도 여름옷에 짚신을 신어야 했고 군량도 태부족이었다. 설상가상 당 중앙은 농촌 지역에서의 무장투쟁 확대를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렸다. 마오는 혁명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성성지화 가이요원'을 인용하여 중국 혁명의 가능성을 역설했다. 중국 전역이 마른 장작으로 가득찬 것과 같은 형세이니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듯 지금은 미미해 보이는 혁명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당 주도권을 쥔 마오쩌둥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혁명의 요람 역할을 한 징강산은 성지가 되었다. 징강산시 중심 교차로에는 대형 마오쩌둥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 앞 조형물에는 '星星之火 可以燎原' 여덟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신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언어의 마술사요 소통의 달인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속담과 격언을 활용하여 메시지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해박한 중국 고전에 기반한 레토릭과 언변으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어 무력의 열세를 뒤집고 천하를 쟁취했다. 문화혁명 때는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단 네 글자로 홍위병을 격동시켜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일인 지배 체제를 공고히 했다. '권력은 총대에서 나온다(槍杆子裏面出政權)' 역시 마오가 남긴 숱한 어록 중 하나지만, 마오의 천하 패권 장악에는 총대(槍杆子)뿐만 아니라 붓대(筆杆子), 즉 문장력도 큰 몫을 담당했다.
일제 패망 직후 장제스가 마오쩌둥을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초대했다. 마오로서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적지(敵地) 방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춥고 배고프고 앞날이 불투명하던 옌안(延安) 시절, 폭설이 내린 어느날 새벽에 마오가 역사 속 천하의 주인공들을 회고하고 이 시대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호연지기를 드러낸 사(詞)를 썼다. <심원춘•설(沁園春•雪)>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이 글이 마침 마오가 사즉생의 각오로 충칭에 가 있는 동안 당대의 애국시인 류야쯔(柳亞子)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폭발한 것이다. 덩달아 마오의 존재감이 장제스를 능가하며 중국 인민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항우가 유방의 목숨을 노린 '홍문연(鴻門宴)'에 비견될 이 충칭회담 조차도 마오의 문재(文才)가 널리 알려지고 성가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니 장제스로서는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닌가 싶다. 마오쩌둥의 시대가 저문 지 오래됐어도 중국 공산당 집권세력은 여전히 마오의 어록을 적재적소에 차용해 정책의 논거로 삼는다.
'성성지화 가이요원'은 마오쩌둥으로 인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울러 작은 시작이나 힘이라도 무시할 수 없으며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격려의 의미가 추가되면서 상황에 따라 경계의 메시지로 또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로 활용되고 있다. 흔히 네 글자로 줄여 '성화요원(星火燎原)'으로 쓰인다.
자연의 영역에서든 인간의 영역에서든 작은 불씨는 큰 불로 번지기 십상이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고 산림을 태우고 세상을 태운다. 인간의 실수와 부주의로 발화한 작은 불씨가 영남의 산들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화력이 월등한 국민당군에 쫓기며 지리멸렬하던 마오쩌둥과 홍군은 혁명의 작은 불씨를 키워 온 세상을 태우고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 영남 산불은 어렵사리 진화되었지만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산불 소식이 들려 온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던 어릴 적 표어가 부쩍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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