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국가대전환=성창훈 한국조폐공사 사장] 돈 만들던 조폐공사의 변신…AI 시대 '디지털 신뢰'를 만든다

  • 화폐 위변조 방지에서 AI 워터마크·디지털 신원으로


“조폐공사는 실물화폐·신분증 제조기관을 넘어 AI·디지털 경제 시대에 국가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인프라 검증기관으로 도약해야 한다.”
성창훈 한국조폐공사 사장의 말이다.

현금이 사라지는 시대에 조폐공사는 무엇을 만들어야 할까. 답은 화폐가 아니다. 75년 동안 돈과 신분증에 새겨온 ‘신뢰’를 이제 디지털 세계에 새기는 일이다.


지폐 한 장의 제조원가는 액면가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이 한 장을 1만원, 5만원으로 믿고 쓴다. 국가가 그 가치를 보증하고 누구도 쉽게 위조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조폐의 본질은 돈을 찍는 데 있지 않다. 신뢰를 만드는 데 있다.


창립 75주년을 맞은 한국조폐공사가 전환점에 섰다. 카드와 간편결제가 일상이 되면서 현금 사용은 계속 줄고 있다. 지폐와 동전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위기는 숫자로 먼저 왔다. 매출은 2021년 5500억원에서 2023년 4461억원으로 줄었다. 공공기관 사이에서 조폐공사가 ‘제2의 석탄공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픽노트북LM
[그래픽=노트북LM]


조폐공사는 가장 오래된 기술에서 길을 찾았다. 위변조 방지와 인증이다. 지폐 위조를 막던 기술을 모바일 운전면허증과 모바일 주민등록증으로 넓히고, 디지털 온누리상품권과 지역사랑상품권 같은 공공결제로 사업을 확장했다.


지난해 전체 매출에서 화폐사업 비중은 19%까지 내려갔고 비화폐 사업이 80%를 넘었다. 돈을 만드는 회사에서 신뢰를 인증하는 회사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AI는 이 변화를 재촉한다. 생성형 AI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흔들고 있다. 얼굴과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낸 딥페이크가 나오고, 사진과 영상은 몇 초 만에 만들어진다. 이런 시대에는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만큼 그 콘텐츠의 출처를 증명하는 기술이 중요해진다.


조폐공사가 AI 기반 디지털 워터마크를 새 사업으로 키우는 이유다. 지폐에 위조방지 장치를 넣어 진짜 돈임을 확인했듯, 디지털 이미지와 콘텐츠에 보이지 않는 정보를 심어 원본과 출처를 확인하게 하는 기술이다.


적용 대상은 문화예술품과 상품, 디지털 콘텐츠로 넓어지고 있다. 공사는 AI 바우처 사업의 공급기업으로 참여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이 기술로 제품과 콘텐츠를 보호할 수 있도록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조폐공사의 미래가 있다. 과거에는 가짜 돈을 막았다면 앞으로는 가짜 디지털을 막는 것이다.


사람의 신원도 디지털로 옮겨가고 있다. 지갑 속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이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왔다. 핵심은 플라스틱 카드를 화면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디지털 공간에서 ‘내가 나’라는 사실을 안전하게 증명하는 새로운 신뢰체계를 세우는 데 있다.


AI 에이전트가 확산되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AI가 사람 대신 물건을 주문하고 예약하며 거래까지 하는 시대에는 “이 AI는 누구의 명령으로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누가 권한을 줬는지, 어떤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지, 거래할 자격이 있는지 검증하지 못하면 AI 에이전트 경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사람에게 신분증과 여권이 필요하듯 AI 에이전트에도 권한과 출처를 확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조폐공사 창립 75주년 세미나에서 공사가 AI 에이전트와 데이터의 출처·권한을 확인하는 공공 신뢰 검증기관으로 역할을 넓혀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아직은 완성된 사업이라기보다 방향에 가깝다. 다만 75년 동안 사람과 돈의 진위를 가려온 기관이 AI와 디지털 가치의 진위까지 가린다는 구상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디지털화폐도 새 영역이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면 조폐공사가 중개 플랫폼이나 인증기관 역할을 맡는 방안도 거론된다.


화폐의 형태가 종이에서 디지털로 바뀌어도 누가 발행했고 진짜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본질은 그대로다.


창립 80주년인 2031년을 겨냥한 ‘세계 최초 디지털 조폐기관’이라는 목표도 종이돈을 디지털로 바꾸겠다는 뜻이 아니다. 실물경제에서 맡아온 신뢰 기능을 디지털 경제로 옮기겠다는 뜻이다.


일하는 방식도 AI에 맞춰 바뀌고 있다. 성 사장은 임원과 소속기관장, 부서장을 대상으로 바이브 코딩 교육을 했고, 사내에서 만든 인사업무 대시보드로 AI가 데이터를 시각화하고 의사결정을 돕는 과정을 직접 시연했다.


경영진부터 AI를 배우게 한 점은 의미가 있다. 조직의 AI 전환은 직원들에게 챗GPT 사용법을 가르친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최고경영진이 AI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못 하는지 알아야 조직과 업무를 다시 설계할 수 있다. 성 사장이 “경영진이 선제적으로 AI 역량을 갖춰 조직의 변화를 주도하고 임직원 누구나 AI를 활용해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강조한 이유다.


조폐공사는 2031년 매출 1조원을 목표로 한다. 지난해 매출은 6395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눈여겨볼 것은 규모보다 구조다.


화폐 비중이 줄었는데도 전체 매출은 오히려 늘었다. 사라지는 사업을 붙잡은 게 아니라 가장 잘하는 능력을 새 시장으로 옮긴 결과다.


많은 공공기관이 배울 대목이 여기 있다. 디지털 전환은 기존 사업에 AI 하나를 덧붙이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해온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조폐공사의 존재 이유를 ‘지폐 제조’로 정의하면 현금 없는 사회에서 설 자리는 좁아진다. ‘국가와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것을 증명하는 일’로 정의하면 시장은 화폐에서 신분증으로, 디지털 콘텐츠로, 다시 AI 에이전트와 디지털 가치로 넓어진다.


AI가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신뢰는 더 귀해진다. 누구나 사진과 영상을 만들고 목소리까지 복제하는 세상에서는 무엇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비용이 커지기 때문이다.


AI 시대 조폐공사의 진짜 경쟁자는 다른 나라 조폐기관이 아니라 가짜와 위조, 그리고 디지털 세계의 불신일지 모른다.


돈의 모습은 사라질 수 있고 신분증의 모습도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거래하고 계약하며 사는 한 ‘이것은 진짜’라고 믿게 하는 기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AI가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시대, 누군가는 무엇이 진짜인지 증명해야 한다. 돈을 만들던 조폐공사가 AI 시대에도 필요한 이유다.

:성창훈 한국조폐공사 사장:

행정고시 37회로 공직에 들어와 기획재정부 경제구조개혁국장·장기전략국장,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선임행정관 등을 거친 경제·정책 전문가다.

2023년 10월 한국조폐공사 사장에 취임해 화폐 중심의 사업구조를 모바일 신분증·공공결제·보안인증 등으로 넓히며 디지털 전환을 이끌고 있다.
 
지난 8월 캐나다 조폐국에서 성창훈 한국조폐공사 사장왼쪽과 캐나다 조폐국 톰 프로갓 최고사업책임자CCO가 MOU 체결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8월 캐나다 조폐국에서 성창훈 한국조폐공사 사장(왼쪽)과 캐나다 조폐국 톰 프로갓 최고사업책임자(CCO)가 MOU 체결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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